고린도 교회는 당시의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도 영적으로 최악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최악의 영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린도전서를 썼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파당 문제, 근친상간 문제, 지체들 간의 소송 문제, 혼인 문제, 우상 제물 문제, 교회 안에서의 여자의 위치 문제, 성찬식 문제, 은사 문제, 부활에 대한 믿음 문제)을 치열하게 다뤘다.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통해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책망하다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의 방언만큼은 약간의 남용과 오용을 지적하기는 했지만 정상적인 성령의 은사로 간주했으며, 오히려 방언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기까지 했다고 주장한다.
만약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예배에서 좀 남용되고, 오용되기는 했지만1) 정상적인 성령의 은사였다면, 바울은 다른 문제들과 비슷한 비중으로 방언 문제를 다루었거나, 혹은 더 가볍게 다루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문제들에 비해 은사에 대한 문제를 세 장에 걸쳐 가장 길게 다루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다른 모든 문제들보다 성령의 은사, 특히 방언의 은사를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겼음이 틀림없다.
고린도전서 전반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파당 문제를 필두로 성령의 은사문제를 포함해 부활에 대한 본질적인 신앙의 문제까지 예외 없이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 있는 성령의 은사 문제도 예외일 수 없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4장 2절, 4절, 14절 등이 방언을 가르치기 위한 바울의 강의가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문제 삼는 바울의 엄중한 책망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문을 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12:1).
본문에서 “신령한 것”은 성령의 은사를 말한다. 그런데 은사의 본론격인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다루고 있는 은사가 대부분 방언임을 고려한다면,2) 바울은 여기서 부정을 또 부정하는 방식의 강조를 통해, 고린도 교회가 특별히 방언의 은사에 대해 바르게 알기를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고린도교회가 겪고 있던 영적인 어려움은 여러 가지 이유들이 아우러져 발생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잘못된 방언의 사용이 가장 큰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에 대한 바른 지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의 잘못된 방언을 지적하는 긴 가르침(고전14장)에 앞서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성령의 은사(특히 방언)의 정의와 함께 고린도전서 13장에까지 걸쳐 성령의 은사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함으로, 고린도교회의 방언(고전14:2, 4, 14 등)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님을 분명히 지적한다.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1절-3절에서 성령의 은사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울의 정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여기서 바울은 "신령한 것"(성령의 은사, 특히 방언)을 "하나님의 영", 즉 "성령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3)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본격적으로 지적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은사(예언과 방언, 특히 방언)에 대한 정의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이유는, 고린도교회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과거 자신들이 경험했던 이방 신전에서의 방언과 다르지 않게 여기는 잘못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4) 당시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은 신자가 되기 전의 과거 경험을 통해 이방 신전에서 시행되는 이교 방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자가 된 후에도 수시로 이방 신전을 들락거렸으므로(고전10:21 참고), 이방 신전의 방언이 이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5) 이런 이유로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이방 신전의 방언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바울은 바로 이점을 염려했으며,6) 불행하게도 실제로 그런 일들이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졌다(고전14:23 참고).7) 바울은 2절에서 이런 현실을 고린도교회에 상기시킴으로써 성령의 은사(방언)로서의 방언은 이방 신전의 방언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지적하려고 하고 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고전12:2).
바울이 여기서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던 이들의 우울했던 과거를 들먹이는 이유는 이들이 과거에 이방 신전에서 경험했던 “우상에게로……”를, 신자가 된 지금에도 “신령한 것”, 즉 성령의 은사와 다르지 않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아서(고전3:1-2) “성령으로” 말하는 “신령한 것”과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말하는 “신령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성령의 은사로서 방언이 아닌, 이방 신전의 방언과 유사한 거짓 방언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는 “예수를 주”라고 하는 대신에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하는 심각한 영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3절에서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말함으로써 고린도 교회가 이런 영적 혼란에 빠진 이유를 지적한다.
고린도 교회가 영적 혼란에 빠진 이유는 이들이 방언을 말할 때 “성령으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8) 이들은 이방 신전의 영성처럼, “성령으로”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따라 움직였다. 이렇게 우상으로 말미암은 영성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성과는 달리 자아도취적인 것으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영성은 결국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14:4)라고 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할 수밖에 없다.9) 또 이런 영성은 자신을 보호하고 높이기 위해 분쟁하며(고전1:11), 당을 만들고(고전1:12), 교만과 허세를 부리고(고전4:6-21; 8:1이하),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며(고전11:22), 자신의 이익에 방해되는 자는 같은 교회의 지체라 할지라도 세속 법정에 소송하는 것(고전6:1이하)도 불사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영성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는 근친상간도 마다하지 않으며(고전5:1), 더욱이 이런 행위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잘난 척하는(고전5:2) 기막힌 영성이다.
그러나 “신령한 것”은 “성령(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은사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예수를 주”시라고 고백한다. 이런 영성은, 우상의 영성과는 달리 성령이 주신 은사로 교회의 덕을 세우며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한다.10)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제자들이 방언하는 것을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한 것을 요엘서 2장 28-32절이 성취된 것으로 설명했다(행2:16-21). 왜냐하면 “성령으로” 말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이 임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2:21)의 성취에 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성취를 위해 성령이 이 땅에 임하셨고, 제자들에게 예언과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성령으로” 예언도 하며 방언도 말하게 하셨다.11) 이로써 아람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현지인들은 예언으로 복음을 듣고, 아람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들은 방언으로 복음을 들음으로써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된 것이다.12)
다시 말하지만,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성령으로” 말하는 방언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영으로” 거짓 방언(과거 우상에게 끌려 다닐 때 체험했던 것과 유사한 방언)을 말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말이었다. 바울의 이런 심정은 3절의 “예수를 저주할 자라 아니하고”가 무슨 뜻인지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예수를 저주할 자”로 번역한 헬라어 원문은 ‘아나세마 예수스’(VAna,qema VIhsou/j)인데 동사 없이 명사 ‘저주-예수’로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본문에 대한 해석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13) 이 가운데 대표적인 학설인 그로마스키 교수의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Cedarville College에서 신약을 가르치고 신약 대부분을 포함한 수십 권의 탁월한 성경 주석을 집필한 그로마스키 교수는 이 본문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분석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쓰셨던 당시의 유대인의 언어 아람어에는 마라나타(marana tha)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위의 본문에서 쓰인 “저주할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마라나타와 발음이 매우 흡사한 아나시마(anathema)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경우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고린도 교인 중 아람어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방언을 할 때 분명 ‘마라나타’라고 말해야 할 때마다 무슨 힘에 끌려서인지 ‘마라나타’를 교묘하게 뒤틀어 아나시마(a-na-the-ma)라고 발음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방언을 할 때마다 예수님을 그리스어로 ‘저주할 자’라 부르는 것입니다.14)
그러나 이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방언을 말하는 모든 자들이 ‘아나시마’만을 반복했을 리는 없으며, 설령 ‘아나시마’라고 말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연히 그런 발음을 한 것뿐이지, 진심으로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말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일본인이 일본어로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 한국말로 욕하는 것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본인에게 ‘왜 욕하느냐’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한국말로 욕한 적이 없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우연히 ‘아나시마’와 비슷한 발음 때문에 생긴 일을 심각하게 여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다음에 소개하는 윈터의 학설이 본문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설명이라고 여겨진다.
윈터가 제시한 새로운 해석의 열쇠는 두 가지다. 첫째, 헬라어 원문은 동사 없이 단지 “예수-저주”(헬: 아나세마 예수스)라고만 쓰였기 때문에, 굳이(기존의 12개의 제안에서처럼) “예수는 저주다”(Jesus is curse) 혹은 “저주를 받았다”(is accursed)와 같은 식으로 번역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예수가 저주를 내린다”(Jesus grants cruse)는 의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 최근 납으로 만든 27개 정도의 고대 저주 토판이 고린도 혹은 그 주변에서 출토되었는데(이방 신전들 구역 내에 있는 아크로코린트 언덕에서 14개), 여기서 우리는 당시에 사업, 사랑, 고소, 혹은 운동경기에 있어서 숙적이나 경쟁자들을 “저주”해 달라고 이방 신들에게 호소하는 관습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Winter, "Religious Curses and Christian Vindictiveness, I Cor. 12-14).
윈터는 여러분이 이방인이었을 때 말을 하지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 다녔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2절)이 이방 종교의 광란 혹은 무아지경과 관련된 어떤 사이비 “영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교의 예배자들이 신의 도움으로 삶의 여러 영역에서 적대자들과 경쟁자들에 대한 우위를 점하려고 노력하던 그런 종교적 분위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것과 6:1-8에서 나타났던 병폐, 곧 자기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했던 태도 사이에 일종의 병행 관계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에 A. D. Nock는 소위 “주술 파피루스”(Magic Papyri)에 이러한 관습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주목하였다.
윈터는 고린도의 배경을 두고 본다면, 질투하고 분쟁하는 태도(cf. 3:1-3)가 이교 예배자들이 아주 내놓고 자기의 신들에게 자신의 경쟁자들을 저주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전3:1-3, 6:18 그리고 다른 구절들과 함께 생각해 보면, 고린도의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영적인” 존재라고 자부하면서 그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려주도록 예수께 요청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바울은 그런 식의 태도는 성령이 그들의 삶 속에 나타난다는 주장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세우거나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다.15)
윈터의 학설을 참고하여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너희가 정말 “하나님의 영으로” 방언을 말하고 있다면 너희 형제들을 저주해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방언으로 형제들을 저주해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성령으로” 방언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방언”은 12장 3절의 성령의 은사와는 다른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신령한 것”(방언)의 주체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임을 명백하게 밝힘으로써, 이들이 하고 있는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의 요지는 “신령한 것”(방언)은 “하나님의 영으로”, 즉 “성령으로”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제시한 “성령으로”는 어떤 은사든지 간에 그것이 성령의 은사인가 아닌가를 분별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설령 그것이 천사의 말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은사일 수 없다.
이제 성령의 은사를 분별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인 “성령으로”를 가지고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언급된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인지, 아니면 성령의 은사와는 상관없는 거짓 방언인지 살펴보자. 먼저 아래 제시한 고린도전서 14장 3절과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밑줄 친 부분을 염두에 두고 서로 비교해 보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14: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성령으로”가 아닌 “영으로” 하는 방언임을 밝힘으로써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영으로” 또는 “성령으로” 하는 방언과는 다른 것임을 지적한다.
개역 한글에서는 14장 2절의 “프뉴마티”(pneu,mati)가 “성령으로”가 아님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그(사람의) 영으로”로 잘 번역했다. 그러나 개정개역에서는 단순히 “영으로”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미진한 변역이다.16) 왜냐하면 “영으로”는 ‘육적으로’와 대조되는 뜻의 “영적으로” 또는 “신령하게”의 의미로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오순절주의자들은 14장 2절의 “영으로”를 “영적으로” 또는 “신령하게”의 의미로 이해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도는 ‘육적으로’ 하는 기도지만 방언기도는 ‘영적으로’ 하는 신령한 기도라고 여기고 있다.17)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영어 성경 KJV에서는 정관사를 넣어서 “in the spirit”로 번역해 이런 오해의 소지를 없앴다. 또한 NIV에서는 아예 “with his spirit”로 번역함으로 본문의 “프뉴마티”(pneu,mati)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했다. 아무튼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말한 “영으로”는 고린도전서 12장 3절의 “성령으로”와 대조시켜 14장 2절의 방언이 12장 3절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성령으로”와 “영으로”는 그 의미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방언을 말하게 하는 주체가 하나는 ‘하나님의 영’(성령)이시며, 또 하나는 ‘인간의 영’이기 때문이다.18) 바울은 이 대조를 통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처럼 “성령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처럼 “영으로”, 즉 “인간의 영”으로 말하는 거짓 은사임을 명백하게 지적한다.19)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근거해서 설명하는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 기도 주장은 성령의 은사로서 주어진 방언이 아니라 명백한 인간의 영으로 하는 거짓 방언이다.
-----각 주-----
1) 바울이 말하고 있는 고전14장의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사실이라면, 남용이나 오용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은사의 사용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사실상 남용이나 오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남용이나 오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라서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고린도교회에서 방언이 남용되거나 오용된 것이 사실이라면,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은사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오순절주의를 비롯한 현대교회에 난립하고 있는 방언의 남용과 오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 고전14:37의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에서, 전후 문맥으로 볼 때 바울이 ‘선지자’는 ‘예언의 은사자’를, ‘산령한 자’는 방언의 은사자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p.335), 고전12:1의 ‘신령한 것’은 ‘방언의 은사’를 말하는 것이 거의 틀림없다.
3) 옥성호 형제는 방언의 정의를 고전14:22이라고 확신한다.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32. 김동수 교수는 옥성호 형제의 이 확신을 아마추어적인 성경 이해라고 호되게 비판했다.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13. 그러나 김동수 교수의 비판도, 나중에 상세히 보겠지만, 옥성호 형제 못지않게 아마추어적이다. 김우현 PD는 고전14:2을 방언의 정의로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내가 진정으로 만지고 싶었던 답이었다. 이 말씀 하나가 방언이 말하는 비밀의 본질을 다 설명하는 것이다.”, “방언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심어놓으신 그 영적 축복의 DNA를……성령님께서 자라게 하시고 물을 주시고 키워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방언에 대한 놀랍고 새로운 문을 여는 열쇠였다.”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130. 방언에 대한 김우현 PD의 이런 이해는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의 이해이기도 하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고전14:2, 4을 방언의 정의로 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중에 상세히 살피겠지만, 고전14:2, 4은 바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정의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만들어낸 거짓 방언을 정의한 것이다. 고전12-14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울의 정의는 오직 고전12:3에만 나타난다.
4) 이에 대해 김신호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방언이 영혼의 언어이며 자신이 아닌 신이 말하는 언어라면, 타 종교에서도 기독교의 방언과 비슷한 현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 외 다른 종교에서도 방언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면, 기독교의 방언과 다른 종교에서 나타나는 방언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일단 둘 다 신이 몸속에 들어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 방언을 말하게 하는 영적 존재, 즉 어떤 신이 방언의 근원이 되는가가 가장 큰 차이라 할 수 있겠다. 기독교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방언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영혼 속에 내주하셔서 우리의 영혼이 기도하는 것이다. 똑같은 의미로 타 종교의 방언도 그들의 신이 임한 결과로 그들의 영혼이 말을 하는 것이다.” 김신호, 성령세례를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185. 방언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의 이런 이해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김신호 목사는 자신의 방언이 신적인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방언과 유사한 이방 종교의 방언도 신적인 것으로 미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의 방언이 이방 종교의 방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5)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p.97-98.
6) 루크 티모디 존슨, 초기기독교 신앙체험, 손혜숙 옮김(서울: CLC, 2010), p.130.
7)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64.
8) 이들은 방언을 말할 때, 성령이 아닌 다른 것으로, 즉 ‘영으로’(‘not with Holy Spirit’ but ‘with his spirit’) 말했다(고전14:2).
9) 앤토니 C. 티슬턴, 고린도전서, 권연경 옮김(서울: SFC, 2011), p.341.
10)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신을 위하지 않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덕을 위한다는 말과 같다. 즉,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만이 교회의 덕을 위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11) 고전12:3을 보면 방언을 말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의 영(성령)”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에 주신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제자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던(행2:4) 방언과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고전14장에서 고린도 교회가 말하고 있는 방언은 “성령으로” 말하는 방언이 아니라 “영으로”(고전14:2), “나의 영으로”(고전14:14), “네가 영으로”(고전14:16) 말하는 방언이다. 따라서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사도행전의 방언과는 다른, 즉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다.
12)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즉 ‘성령으로’가 아니라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방언은, 듣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미쳤다’고 말하게 하며(고전14:23), 방언을 말하는 자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므로, 자신도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다. 갈4:6을 참고하라.
13) 로버트 토마스는 그의 책에서 열 가지의 의견들을 소개한다. 로버트 토마스, 성령의 은사들, 김지찬 옮김(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3), pp.29-30). 앤토니 티슬턴은 자신의 NIGTC 주석 First Epistle(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0), p.917-927 에서 열두 가지의 의견들을 소개하고 있다.
14)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p.119-120.
15) 앤토니 C. 티슬턴, 고린도전서, 권연경 옮김(서울: SFC, 2011), pp.341-343.
16) 이런 실수는 [개역한글]에서도 범한다. 고전14:15의 “내가 영으로”도 “내가 그 영으로”로 번역해야 오해의 소지를 불식시킬 수 있다.
17) 김신호, 성령 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111. 심지어 ‘표준 새 번역’에서는 “프뉴마티”를 아예 “성령으로” 오역해 놓았다.
18) 톰슨성경편찬위원회, 톰슨 바이블2(서울: 기독지혜사, 1997), p.281.
19) 김동수 교수는 고전14:2의 방언기도에 대해 말하면서, 바울은 신자가 “성령으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방언이라고 정의했다고 주장한다.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46. 그러나 이것은 “영으로” 말하는 고린도교회의 거짓 방언을 “성령으로” 말하는 성령의 은사로 슬쩍 둔갑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