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일반계시를 주셨다. 이 일반계시의 주요 기능은 핑계치 못하게 함이다. 인간들은 모두 죄인이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공의요 공평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을 구원할 의무가 없다.
오늘날 신문과 방송을 보면 참으로 입에 담기 힘든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 어른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에서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해괴 망칙한 일들이 많다.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어떠한 결과가 생길까? 오늘 본문은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때 나타나는 행동들을 말하고 있다. 이 결과들을 보면서 우리는 복음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고 많은 영혼들이 교회에 와서 구원받는 역사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18절) 의가 오직 복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반대논증을 하고 있다. 이것을 통하여 복음으로 말미암는 의 없이는 모두가 정죄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말씀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다. 왜 진노를 받고 있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진리를 막고 있는가?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다. ‘진노’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보복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리를 ‘막는다’는 말은 그것을 삭제하거나 덮어 감추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막는 자들은 절도죄를 범한 것이 된다. ‘불의’로는 히브리어의 관용구로서 ‘부당하게’를 의미한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 바울은 예증들을 들고 있다. 첫번째 예증은 첫째는 하나님은 세계의 구조와 그 구성 요소들의 가장 찬란한 질서들을 주셨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의무를 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며, 비열하고 간악한 배은망덕의 죄가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9절) 그러면 그들은 진리를 의도적으로 막고 있는가? 그렇다. 1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오늘 본문 18-32절까지 사도 바울은 여러 번 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안다.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보임이라는 것은 영어로 evident(NASB)이다. 희미하게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토 그노스톤)들은 하나님의 속성의 현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속성을 새기셨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느낀다. 인간은 창조된 세계의 구경군이 되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주신 이유는 매우 대단한 장엄한 형상(피조 세계)을 눈여겨 봄으로써 우리를 창조주 하나님께로 인도함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셨다.
*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크신 하나님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맞추어주셨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절) 20절 상반절에서 말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하나님에 관한 속성은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속성의 일부분을 만물에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위엄은 그의 모든 작품들과 그의 모든 피조물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거울 또는 반영(specula seu spectacula)이다. 우리는 이것들로 하나님을 알 수가 있다. 이것들이 자기들의 창조주를 나타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속한 모든 속성들을 다 상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에 대한 지식에 이르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우리의 제한된 능력에 자신을 맞춰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체를 알려고 하는 자들은 바보들이다.
* 하나님의 속성과 신성은 함께 존재한다. 신성에 속성이 포함되어 있다.
* 히브리서를 사도바울이 썼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의 속성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20절 하반절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the existence of God)를 나타내 주는 이러한 증거들로 인해 핑계할 수 없다. 우리는 핑계할 수 없는 만큼만 본다. 핑계하지 못할 정도의 하나님의 지식과 구원의 지식은 다르다. 우리는 신성에 대한 개념(a conception of divinity)을 가지고 있다. 즉 일반계시로 인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사람들로 단지 핑계할 수 없도록 할뿐이다. 그러나 특별계시로 인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게 해준다. 이 두 가지 신지식은 크게 다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절) 21절 상반절에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있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않았다(과거)”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넣어주셨다.
* 하나님의 속성 없는 하나님 개념 형성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신 개념에는 그의 영원한 능력과 지혜, 선하심, 진리, 의, 그리고 긍휼을 포함해서 구성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그가 만물을 그의 손아래 붙들고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서 존재케 하신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그의 지혜는 그가 만물을 완전히 질서 있게 정돈하신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선하심은 그가 만물을 창조하신 데에 있다. 그의 선하심 외에 다른 이유로 만물을 보존케 하실 수 없다. 그의 공의는 그가 세계를 통치하는 데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의 긍휼은 그가 인간들의 사악함을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고 참으시는 데서 나타난다. 그의 진리는 그가 불변하신다는 데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 개념을 가진 자들은 그의 영원성, 지혜, 선하심, 그리고 공의에 합당한 찬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빚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자비 때문만으로도 그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낮아지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많이 빚지게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나 되는 것처럼 그에 대한 환상을 꾸며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그의 영광을 사악하게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자비에 “감사치도 아니하였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결국 이들의 불의로 인하여 참지식의 씨는 자라서 성숙하기 전에 그들의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곧바로 질식되어 버렸다.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22절)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감사하지 않은 자들은 그러면 무엇을 하는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한 것은 특별히 철학자들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다. 모든 민족과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은 자들은 더 똑똑해졌는가?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혜롭게 된 것이 아니라 어리석게 된 것이다. 이것을 영어로는 바보(fools)가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을 버려서 천재가 된 것이 아니라 바보가 된 것이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절) 어느 정도로 바보가 되었는가? 자기가 관리하고 다스려야 할 피조물들을 오히려 주인처럼 섬기는 바보가 되었다. 기어 다니는 동물까지도 섬기는 바보가 되었다. 즉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다” 모든 사람들은 철저히 미련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소원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을 썩어질 사람의 모양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더렵혔다. 또한 더 나아가 가장 비천한 짐승과 같은 저급한 종류의 우상을 만드는 수준까지 전락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절)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하나님은 당장에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버려두셨다. 24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신다. 어떻게 내버리시는가?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신다. 마음의 정욕은 어떠한가? 더러움이다. 바울은 인간의 심령의 악한 정욕들을 더러움과 관련짓는다.
하나님의 보복이 인류에게 명백히 나타난다.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허용하실 뿐만 아니라 작정하셨다. 그래서 ‘내버려두사’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죄를 허용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행자요, 집행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원인이 아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5절) 그들은 부당하고 신성 모독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에게서 영광을 빼앗아 피조물에게 주었다. 그들은 이렇게 우상 숭배의 죄를 지었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 구절로 비판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 하고서 여러 모양의 형상들을 예배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구실을 붙이기 위한 허무맹랑한 핑계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인정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것을 받으실만한 것으로 여기시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는 참 하나님을 결코 예배한 것이 아니며, 육적인 인간이 독자적으로 고안해 낸 가짜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다.
버림받은 결과 1- 음행(26-28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26절) 사도 바울은 이제 모든 인간이 예외가 될 수 없는 죄악들을 열거하고 있다. 모든 인류는 한 두가지 죄악으로 오염되지 않는 자는 없다. 사람들의 변태적인 정욕은 그의 보복이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7절)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절)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마음(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돌이켰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비뚤어진 마음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아무 올바른 것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뚤어지게 선택함으로써, 하나님보다 그들 자신의 허망한 것을 더 좋아했다. ‘합당치 못한’ 이라는 말은 모든 이성의 결정에 반대되고 인간의 본분에도 어긋나는 행동을 의미한다.
버림받은 결과 2- 온갖 불의(29-31)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29절)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30절)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31절) 어거스틴은 스토아 학파를 논박하며 자비가 그리스도인의 덕목이라고 하였다.
버림받은 결과 3- 알면서 행하고 동조함(32)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절)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동의하고 인정하며, 힘을 싫어주는 4것은 악의 극치이다. 모든 수치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보다 악덕을 장려하는 것은 사악함의 극치이다.
나오는 말
사람들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 결과는 어떠한가? 결과는 온갖 우상숭배와 동성애와 온갖 악한 불의가 이 세상에 가득할 것이다. 그러면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좌절만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제 하나님은 이러한 악한 자들을 향하여 우리에게 특별계시인 복음을 증거하게 하신다. 특별계시인 복음은 죄 많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주고, 그의 모든 죄를 씻어주며 하나님의 의를 덧입게 해준다. 복음은 생명을 준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소망 가운데 성령의 능력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진실로 이 세상의 소망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복음 밖에 없다.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가득넘쳐서 모든 택한 자들이 하나님의 의로 덧입고, 넘치는 생명가운데 하나님의 복과 은혜와 평강을 누리기를 바란다.
조창훈 목사(방배본교회, 한국개혁신학연구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