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에배를 마치며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라고 찬양한다. 이 찬양을 놓치지 않는 이유는 이 찬송의 가사가 우리교회의 비젼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삶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나누는 것을 비젼으로 삼고 출발한 교회이다.
삶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이 전제된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23:1-2)’라는 다윗처럼 고백하며 살아가는 삶이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삶이다. 우리는 다윗이 그의 삶 어디쯤에서 이 노래를 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다윗이 아버지에게 조차 무시를 당하는 어린 시절 양치기 생활을 하면서 노래한 것이라면, 이 노래는 미래의 자기 삶이 여호와로 인해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노래 한 것이 되고,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고난의 시기에 노래한 것이라면, 그런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겠다는 믿음을 노래한 것이 된다. 혹 이 시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노래한 것이라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렇게 많은 역경과 고통의 순간순간 마자 목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해 살았다는 감사의 노래가 된다. 이렇게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삶’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고백하는 고백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있는 교회는 시작되었다.
따라서 ‘삶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해서 갈대아 우르를 따날 수 있었던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고,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로마서4:19)’은 몸에서 태어난 이삭을 바치려 했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히브리서11:19)’했기 때문이다.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살아서 일하심을 믿고, 더 나아가 자기의 삶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즉,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특징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할 뿐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산다. 그런 삶을 감당하게 하는 원리는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는 안경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빌립보서3:7-9)’이러고 말할 수 있었다. ‘삶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가치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해석함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삶에서 만나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세상과는 다른 가치를 위해 살아간다. 우리의 삶의 가치는 ‘의’이다. 의에 대하여 목말라하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아도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산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면서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라고 찬양하는 이유는 당연히 ‘삶에서 만나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의 삶의 가치와 삶의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에 드러나게 될 삶, 즉 ‘걱정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한 삶을 살겠다는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런 삶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가 된다. 나는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다.
오성환 목사(이야기가 있는 교회, 세움선교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