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하얀 도화지를 바라보면 그 안에 가득 채워질 그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레였다. 물론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는 언제나 후회와 안타까움이 있었지만, 하얀 도화지를 바라볼 때는 그런 안타까움이나 후회스러움 보다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질 그림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것 같다. 그리고 새롭게 도화지를 받을 때 마다 먼저 번 그림보다 더 잘 그려야지 하는 용기와 작심이 있었다. 그 용기와 작심은 결과에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도화지를 만날 때 마다 마음을 두드렸다. 내가 그린 그림들은 어떤 때는 너무 복잡하고 세밀하게 그린 밑그림과 거친 붓놀림이 그림을 망쳤고, 어떤 때는 대충 그려도 되겠다는 교만함으로 그림을 망치기도 했다. 때로는 게으름으로 제때에 그리지 못해 인정을 받지 못하던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내 그림이 맞다고 우기면서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박하게 깍아 내렸지만, 내 그림도 다른 사람들이 그린 그림들보다 더 낫지 못함을 느끼고 좌절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보면서 ‘잘 그렸다 못 그렸다’를 판단하는 그 오만과 교만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잘 모르겠다. 그림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문제인데 말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느껴지는 생각은 좋은 그림은 좋은 밑그림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밑그림은 내가 그리려고 생각하는 모양이나 색깔 등에 대한 제한이다. 인간 스스로가 낮아지는 하나의 과정이 밑그림이 된다. 있는 그대로의 세밀함을 단순함으로 바꾸는 용기가 밑그림이고, 그림의 전체적인 조화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절제하는 낮아짐이 밑그림이다. 때로는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들을 너무 강조해서 그림의 전체적인 균형을 깨뜨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내가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넣을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밑그림이다. 밑그림을 바탕으로 사람은 그리려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해석하고 새롭게 함으로 그림의 대상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그림 속에서는 하얀 꽃이 붉은 색으로 바뀌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의 모습이 일그러지기도 하고, 아름다운 형체가 난잡한 선과 색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그려지고, 나 혼자의 꿈이 모두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그림이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새로운 도화지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용기와 그림을 잘 그려야겠다는 마음은 도화지 위에 그리는 밑그림에서부터 어긋날 때가 많았다. 잘못 그려진 밑 그림으로 그림에 넣어야 할 나의 생각은 없어지고 생명이 없는 죽음의 색이 도화지에 가득한 아픔을 느끼기도 했다.

누구나 하얀 도회지를 받으면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자기 그림을 만족하는 사람들과 자기 그림에 불만족하며 다른 사람들 것과 비교하면서 후회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된다. 그렇다 할지라도 같은 그림은 세상에 없다. 남이 그림을 전문적으로 복사하는 복사전문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도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씩 다른 점들이 있다. 그런데도 요즘은 사람들에게 똑 같은 그림을 그리도록 강요한다. 그림을 그릴 때구도를 잡고, 색을 입히는 방법이 같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전시한 곳에서는 그림을 그린 사람과 장소, 그리고 색깔 만 다른 같은 그림들이 전시된다.

교회는 하얀 도화지를 받아든 아이와 같다. 하나님께서 그려주신 좋은 밑그림을 바탕으로 ‘우리교회’만의 그림을 그린다면 하나님께서 잘 그렸다고 칭찬하시지 않을까? 

오성환 목사. 이야기가 있는 교회. 062-376-3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