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의 ‘자화상’이란 시입니다. 나라 잃고 힘들어하는 사나이의 모습을 ‘산모퉁이 돌아 논가 외딴 우물’에서 봅니다. 우물 속에 비친 현실은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달과 구름과 하늘이고 계절이지만, 우물에 비쳐지는 사나이가 때로는 미워지기도 하고, 때로는 불쌍해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 현실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나’에 대한 애증 때문일 것입니다. 조국을 빼앗긴 이런 현실을 뒤엎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기도 싫고..... 무엇인가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딱히 ‘그 무엇’을 할 수 없는 현실적으로 무능하고 갑갑하기만 한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나’를 바라볼 때 갖는 이런 애증은 누구에게나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밉고, 가엽고, 그리운 나의 모습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느껴지는 ‘나’의 모습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나’를 기뻐하면서 바라보는 분이 계십니다. ‘나를 바라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그분이 있기에 비로소 ‘나’는 나의 가치가 발견되는 것이지요. 문득, 나도 우물에 비친 ‘나’의 모습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의 우물에도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 우물에도 여름이 있고, 파아란 바람이 스치는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비쳐진 그 사나이는 무엇 때문에 힘들고 아파하는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 나의 우물에 비친 나는 언제나 윤동주 보다 더 아픈 모습의 자화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받아주심으로 그의 자녀 삼으신 주님이 있기에 우리의 자화상은 윤동주의 자화상과는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이 있기에 말입니다.